호응이 일상
[20180929] 대청봉은 다음 기회에 본문
양폭대피소에는 전부 등산복을 풀세트로 갖춰입은 아줌마들과 아저씨들로 가득했다. 그 와중에 동네 뒷산 올라갈 법한 패션을 한 젊은이 셋이 김밥을 먹고 있으니 튀지 않을 리 없었다. 우리 앞에 앉아서 먹을 걸 꺼내던 아줌마 몇 분이 어디까지 가냐며 말을 걸어왔다. 아무 생각이 없던 우리는 대청봉까지 간다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 우리는 싸해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 아줌마들은 물론이고 일행으로 보이는 아저씨들 표정까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친놈들아 이 시간에 대청봉을 어떻게 가 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9시 뉴스에서 조난당한 우리를 보고 싶지 않으셨던 아줌마들은 대청봉은 무리라며 우릴 말렸다. 아직 상황파악 못한 우리, 그 중에 B는 과제라며 꼭 가야한다고 했다. 그 분들은 처음엔 오늘은 이만 내려가고 내일 다시 올라오라고 하셨으나 곧 그래 너네 젊으니까 어디 갈 데까지 가봐라 라고 생각하셨나보다. 쉬지 말고 대청봉으로 올라가고, 오색으로 곧장 내려오라고 하셨다.
랜턴 있니? 아니요. 먹을 건? 김밥 세 줄 남았어요. 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다 망가져가는 랜턴 하나와 초콜릿과 빵 등 비상식량을 잔뜩 얻어들고, 1.8L 물 한 통과 랜턴 하나를 새로 사 들고 목표했던 휴식시간을 다 채우기 전에 대청봉으로 다시 향했다.
WOW
이제 제법 높이 올라간 느낌이 난다.
아름다움의 연속이었다. 다만, 애들이 너무 지쳤다. 다음 휴식 예정지였던 희운각대피소까지 가는 데 한 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중간부터 이 친구들, 특히 대청봉을 제일 가야 했던 B놈의 체력이 심각한 수준이라, 나는 좀 올라가서 애들 기다리고, 조금 올라가서 애들 기다리고를 반복해야 했다. 내 마음은 급한데 따라오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답답한 마음에 작은 짜증도 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미안하다.
이제 붉은 단풍도 보인다.
희운각대피소를 코앞에 두고, 경치가 훌륭한 전망대가 하나 있다. 친구들은 다 죽어가는 표정을 하고 전망대에 몸을 던졌다.
올라오는 길에 죽을 상을 하고 올라가니, 앞에 천천히 올라가던 아저씨들이 또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다. 어디까지 올라가냐고 물으니 이번엔 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청봉이라 했다. 이번에도 아저씨들은 대청봉은 오늘 무리라면서, 내려가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곧, 본인들은 희운각대피소를 보름 전에 예약해서 잘 수 있는데, 어디 대피소 가서 불쌍한 척하고 빌어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우리에게 이 방법은 유일한 희망이었고 거기서 힘을 얻어 딱 희운각대피소까지만 올라가자고 했다.
전망대에서 좀 쉬던 우리는 바로 희운각으로 향했고, 얼마 안가 도착했다. 우리는 중청대피소부터 전화를 돌려봤다. 안된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곧이어 희운각대피소에 전화를 해봤다. 비박은 불법이니 되돌아가란다. 그리고 우리보고 들으라는 듯 안내방송으로 예약을 못하신 분들은 서둘러 하산하라고 했다.
무서워졌다. 지금까지 4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여기까지 올라왔고, 이 길을 따라 그대로 내려갈 엄두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올라가기엔, 남은 길은 지금까지 올라왔던 길보다 더 험한 길인데 이 친구들의 체력이 도저히 받쳐주지 못했다. 곧 희운각대피소 관리인이 나와 너희는 젊으니 여기서 비선대까지 빨리 내려가면 어두워져도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다며 서둘러 내려가라고 다그치듯 말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대청봉을 무대뽀로 올라 오색으로 빠르게 내려가는게 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관리인 몰래 대청봉 쪽으로 빠지려 했으나 걸렸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시면 안된다고 혼났다. 그렇게 우리는 산 아래로 쫓겨났다.
우리는 배가 고팠다. 남은 김밥 세 줄을 먹어야 했다. 더 이상 희운각에 남아서 김밥을 먹다간 더 혼날 것 같아서 도망치듯 내려왔고, 그 대피소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김밥을 먹으려고 앉으려는 찰나, 두 다리에 쥐가 확 올라왔다. 어떻게 쥐는 풀렸고 앉아서 김밥을 먹을 수는 있었는데, 다시 덜컥 겁이 났다. 쥐는 원래 한 번 올라오면 수시로 재발하는데, 이게 내려가다가 쥐가 잘못 올라오면 변사체가 되는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근데 배가 고팠는지 그런 걱정은 금방 잊고 마지막 만찬인 마냥 김밥을 맛있게 먹고, 양폭에서 아줌마들이 준 초콜릿으로 당 보충도 해주고, 물통을 비웠다.
우리는 살기 위해 달리다시피 산을 내려왔다.
얘네들 아까까지 힘들어 뒤지려고 하던 그 친구들과 동일인물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내려갔다.
산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 와중에 구름이 진하게 깔린 바위산은 아까 맑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우리가 맨 처음 쉬었던 그 장소가 나올 때까지, 양폭대피소를 지나 쉼 없이 내려갔다.
산의 해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졌다. 전망대에서 물을 비우고 단 한 차례도 수분 보충을 하지 않으니, 발을 헛디뎌서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저체온증 외에 탈진까지 죽을 수 있는 옵션이 하나 더 늘었다.
대피소에서 산 랜턴의 성능은 경악스러웠다. 단 한 사람만이 겨우 전방을 주시하고 갈 수 있을 정도. 우리는 휴대폰 후레쉬 두 개를 동원하여 산을 내려왔다. 바닥이 생각보다 미끄러워 조심스레 내려왔어야 했다. B는 내려가던 도중 발을 헛디뎌 계곡으로 떨어졌는데, 정말 너무나도 다행인 것이 계곡과의 높이차가 거의 없는 지점에 오자마자 미끄러져 조난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말을 잃고 비선대까지 내려갔고, 등산로 초입의 시멘트길이 나오자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산을 좋아하시는 어떤 부부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우리의 속도대로 마침내 소공원으로 살아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초점이 나갔지만.
우리는 등산을 시작할 때 탔던 택시기사님께 연락해서 그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내려왔고, 기사님이 밥 먹을 수 있는 물회집과 주변이 싼 민박까지 잡아주셨다. 물회를 먹고 아직도 허기가 졌기에, 닭강정까지 사러 가기는 귀찮고 주변 치킨집에서 치킨을 포장해서 동해바다를 보고 우리가 미쳤었지 하며 치킨을 먹었다. 친구들은 민박에서 하루 묵고, 나는 23시 반에 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복귀했다.
걸음 수는 5만 걸음을 넘겼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 산은 내게 오기가 생기게 했다. 다음 번에 반드시 정복하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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