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응이 일상
[20180929] 평화로운 속초의 아침 본문
할 일 없던 금요일 밤, 칼바람에서 나르를 잡고 시원하게 트롤링을 한 후 토요일 00시 45분경 방을 나섰다. 터미널까지 택시 할증붙는게 아까웠던 나는 4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무작정 걸었고, 버스 시간이었던 1시 반을 8분 정도 남기고 도착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을 가는 버스를 포항에서 새벽에 타기는 또 처음이었다.
버스는 약 4시간을 달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추석을 갓 지난 날씨는 내 상식으로는 추울 리가 없었기 때문에 츄리닝 바지에 맨투맨티 하나, 그리고 혹시나 산에서 추울까봐 내가 학교에서 갖고 있던 옷 중 가장 두꺼운 기모 있는 후드집업을 챙겨왔다. 그런데 웬걸, 굳이 산까지 가지 않고 가진 모든 걸 다 껴입어도 새벽의 속초는 추웠다.
그 와중에 새벽의 속초는 운치있었다.
버스에서 잠을 제대로 못잤고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할 게 없었다. 동트기 전 새벽에 깨어있으니 중학교 다닐 적 새벽 일찍 일어나서 도서관 가던 시절이 생각나, 시립도서관이라도 가서 눈 좀 붙여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속초의 사람들이 인천 사람들보다 덜 부지런한건지 인천 사람들이 유난을 떠는건지 몰라도 6시는 커녕 모든 도서관이 9시에 열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작정 걸어 속초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때마침 동해바다에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속초해수욕장에 도착하기 직전, 6시 반에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기로 했던 놈들이 과연 일어났을까 싶어 전화를 돌려보았다. 정말 놀랍게도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동트기 직전의 모습이다. 정확히 1년하고 몇 개월 전에 왔던 기억이 난다.
해뜨기 직전, 6시 10분을 좀 넘긴 시간에 한 친구한테 방금 일어났다고 전화가 왔다. 그럼 그렇지 얘네들이 밤샌다고 해놓고 한 번도 제대로 샌 걸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버스시간 전에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이제 씻고오겠단다. 버스 출발이 20분도 안남았는데 얘가 미쳤나 싶어 당장 택시 잡아타고 터미널로 가라 그랬다. 다행이도 이 친구는 가까스로 버스를 탔다. 앞으로 이 친구를 A라고 하겠다.
전화로 친구가 택시 잡는 걸 생중계로 듣는 와중에 해가 떴다. 정말 평화롭게 해 뜨는 장면을 보았으면 지친 심신을 달래고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생각은 이미 혼자 대청봉 찍고 올 계획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한창 일출사진을 찍고 있던 중, 또 다른 친구한테 전화가 온다. 지금 일어났단다. 6시 20분경 일어났던 이 친구는 한 타임 뒤 버스를 타고 갈테니 예매한 버스를 취소하고 다음 걸로 예매해달란다. 이거라도 타고 오는게 어딘가 싶어 8시 버스로 예매해드렸다. 앞으로 이 친구를 B라고 하겠다. 그리고 새벽 3시에 게임하고 있다며 밤 잘 새고 버스탈테니 안심하라던 C라는 친구는 끝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추석연휴도 다 지나서 뜬금없이 속초에 온 이유는 오로지 늦잠빌런 B 때문이었다. 이 친구가 '인간과 자연환경'이라는 교양과목을 듣는데, 교수가 대청봉을 찍고 오면 A+을 주겠다는 여지를 남겼나보다. 공부를 하기 싫었던 이 친구는 몸으로 때울 생각이었는지 각기 다른 대학을 다니는 동네 친구들을 모아 호기롭게 대청봉을 당일치기로 찍고 오리고 했다. 마침 객체지향프로그래밍 과제를 거의 마칠 예정이었던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오랜만에 산이나 타보자 해서 간다고 했다.
일출을 보고도 애들이 오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많이 남아, 좀 더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왜 이렇게 누리끼리하게 찍혔을까... 황금빛 태양을 머금은 속초라고 생각하자.
속초에는 큰 호수 두 개가 있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 청초호를 보고 설악대교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다. 호수를 끼고 아름다운 설악산을 등진 천혜의 입지를 가진 도시이지만 개성없는 흰 콘크리트 블럭만 보여 아쉬울 뿐이다.
이제 해는 완전히 떴고, 산도 안올랐는데 버스에서 내린 이후로 약 10km를 내내 걸었다. 친구들은 고속버스터미널로 오는데, 마침 그 주변 스타벅스가 일찍 오픈한다 하여 시간을 때우러 갔다. 과제를 마무리할 겸 노트북도 가져왔기 때문에 심심할 이유는 없었다. 그 전에 배가 고파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물로 배를 채웠다. 추운 아침에 열심히 돌아다녀서 그런지 갑자기 연신 재채기가 나오고 콧물이 끊임없이 쏟아졌지만 스타벅스에 들어가자 좀 나아지길래 약은 먹지 않았다.
그렇게 9시 반쯤, 씻지 못하고 출발한 A가 도착했다. 전날 사이즈를 모르고 츄리닝을 샀던 이 친구는 츄리닝이 맞지 않아 청바지를 입고 산에 오르게 생겼다. B가 늦게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씻고 싶다며 곧장 사우나로 갔다. 또 배고프다며 김밥천국에서 김치찌개를 열심히 먹던 도중 대망의 B가 아버지의 등산화를 신고 도착했다. B가 김치찌개값과 6줄의 김밥값을 내고, 500mL 물 단 3병만을 사들고 택시를 잡아타고, 11시 20분경 드디어 설악산국립공원 소공원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 산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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