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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요? (1) 본문
"'나'를 설명해볼래요?"
정신과 의사가 문득 던진 질문이다. 정확한 구절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개였던가, 설명이었던가. 아무튼 맥락은 같다. 불안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마주한 이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근 10년간 이어왔고, 그에 대한 해답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허허. 혹시 나를 설명하는데 '포항공대'가 꼭 필요한가요?"
'글쎄요' 따위로 머뭇거리자 다음의 질문을 덧붙이셨다. 그 전에 다른 말씀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나를 무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지금까지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의사는 지금까지 내가 자존감을 유지해 온 요소는 '학업과 그에 대한 성과'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거의 맞는 추론이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어떤 존재였던가를 떠올린다면, '공부를 상당히 잘하던 아이'였다. 물론 그런 중학교 때의 내가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남들은 쉽게 받을 수 없는 한 자릿수의 전교 성적을 밥 먹듯 받으면서도 생각치 못한 수학에서의 실수 등은 나를 항상 괴롭혀 왔다. 아니, 굉장히 많이 괴롭혔다.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받으면서도 나는 내 자신을 항상 깎아내리기에 바빴고, 2% 아쉬운 성적 때문에 자주 울었다.
내가 과학고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교내 수학경시대회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1등을 거머쥔 나에게 선생님은 나를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다. 다원연립일차방정식(미지수가 4개였던 걸로 기억한다)을 이렇게 푼 학생은 나밖에 없다고, 수학에 굉장히 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과학고 영재원 시험도 봤다. 이미 영재원을 다니고 있는 친구 셋을 제외하고 2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우리학교에 배정된 나머지 TO는 단 한 자리. 10여 명이 응시한 교내 선발 시험에서 1등을 하고 나머지 셋과 2차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조금이라도 도움되라고 보내주신 학원에서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듣고 본 2차 시험에서 나는 우리학교에서 유일하게 3차에 응시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나보다 많은 지식을 알고 있던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도 2차를 떨어졌다. 3차를 붙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살아생전에 면접 준비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나는 면접에서 꽁꽁 얼어붙었고, 그렇게 최종 불합격했다. 물론 면접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선생님께서는 교직생활을 길게 하지는 않았지만 이만큼 똑똑한 친구는 처음 본다고 어머니께 말하셨다. 나 들으라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이미 교내 수학경시대회를 마친 시점부터 내 머리에 대한 신뢰도는 급격히 높아졌다. 어쩌면 내 머리가 되게 좋은 편일지도 모른다고. 그러고보니 초등학교 때 평균 95점 아래로 맞아본 역사가 없다. 공부를 안했던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을 제외하면. 아,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수학경시대회에서 번번히 은메달을 따 왔다. 내 비교 대상은 언제나 금메달을 딴 나보다 높은 성적을 받은 친구였지만 다행히 그 당시 9살의 나는 너무 어렸고, 6학년 때의 나는 그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4반의 1등으로 입학했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임시반장이었던 나를 불러서 너가 우리 반 1등으로 들어왔다고 전하셨다. 배치고사 정말 대충 봤는데, 심지어 사회 과목 과목코드는 잘못 썼나 헷갈렸는데. 그런 내 모습을 나는 당연하게 여겼다. 입학 후 처음 봤던 중간고사에서 3을 빼야 할 걸 더하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한 문제를 틀렸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굉장히 뼈아팠다. 과학고에 가려면 수학과 과학 성적은 완벽해야 하댔는데. 어린 나이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144에서 3을 뺀 141이 답이었다는 사실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전교 4등을 하며 역시 내 머리는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말고사는 한 술 더 떠서 수학에서는 91점이란 나로써는 굉장히 우울한 성적을, 그리고 다른 과목에서도 (나에게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전교 28등으로 수직하락했다. 과학고라는 목표를 때려쳐야하나 싶었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수학 선생님이셨는데, 나중에 나에게 추천서를 써 주셔야 하는 선생님께 안좋은 인상만 남기는 듯했다.
이 학기 중간고사에서 받은 95점이라는 성적은 나에게 또 다른 뼈아픔을 남겼다. 인천대 영재원에 지원할 4명을 추천받는데, 이 수학 성적 때문에 나는 5순위로 밀려났다. 금방 전학을 가버릴 친구가 내 위에 순위를 하나 차지했다는 사실은 괜히 분하게 만들었다. 이 설움을 기말고사에서는 반드시 설욕하고 싶었는데 도리어 4점이 더 떨어졌으니 쓴 패배감을 맛보았다. 겨우 이런 것에.
다행히 2학기에는 수학 성적에서 빈틈없음을 보였으나, 대신 중간고사 과학에서 88점을 받는 처참함을 또 겪어야만 했다. 식물의 물관과 체관 위치를 헷갈려 두 묶음 문제를 틀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과학 성적이 아니었다. 담임선생님께서 과학고 준비를 위해 애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을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나와 어머니는 학원차가 언제 우리 동네에 서는지를 알아내어 그 차를 타고 학원을 방문해 상담을 받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그 정도 선행학습으로 과학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절대 붙지 못할 거예요."
다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3인 1조의 과외를 붙여주셨다. 다른 친구들은 과학고가 목표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나 때문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도를 빼기 시작했다. 원래 다니던 학원에서도 숙제를 지지리도 안해갔던 나로써 굉장히 힘들고 벅찼다. 숙제도 자주 안해가거나, 답지를 베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여차저차 진도를 어느 정도 맞추고, 부평에 있는 지점에서 시험을 보고 두 개의 반 중 상위 반에 들어올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학원 이야기도 할 얘기가 많은데, 학교 성적 이야기로 돌아오자. 중학교 2학년 때의 수학 성적은 훨씬 처참했다. 가까스로 역시나 반 1등으로 배정된 것 같은데, 우리 반에는 1학년 때 중간에 전학을 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성적은 꽤나 유명했는데, 실제로 2학년 내내 나는 그 친구를 성적으로 이겨본 적이 없다. 그 와중에 내 수학 성적은 각각 91점과 83점을 기록했고, '과학고를 가고 싶다'라고 학기 초에 수학선생님께 말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과학고 진학 권유는 내가 아닌 다른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아, 83점이라는 점수가 나에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실망스러운 점수였냐면, 나는 그 당시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해보게 됐었다.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저 질문 하나로 너무 먼 옛날로 돌아간 탓일까. 아직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남았는데. 지금 당장 글을 전부 완성시킬 시간이 되지 않아서 우선은 글을 나누었다. 언제 글이 끝맺음을 낼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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